본문 바로가기

라이프

영화기자가 들려주는 영화 속 보험 이야기 <스틸 앨리스>



몇 년 전 수술을 받았던 때가 기억납니다. 간단한 수술이긴 했지만, 수술 후 회복을 하는 일주일의 시간 여, 아픔을 떠나 우울함이 오더군요. 종합병원 건너 편 대형백화점, 쇼핑을 하러 온 사람들의 활기찬 모습을 바라보면서 문득 벙벙한 환자복을 걸친 내 모습이 그렇게 초라해 보일 수 없었습니다. 적어도 이 기간만큼은, 난 바쁘게 취재와 마감을 하는 기자, 또 여가시간에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즐겁게 웃을 수 있는 ‘내’가 아니라 그저 나약한 환자일 뿐이라는 느낌이 들어서였습니다. 


알츠하이머병을 선고 받은 50살의 여성. <스틸 앨리스>의 앨리스(줄리안 무어)를 보면서 당시의 그 상실감이 떠올랐습니다. 그녀가 걸린 조발성 알츠하이머는 뇌기능의 퇴행성 뇌질환으로, 이 병에 걸리면 자신의 기억을 서서히 잃어가게 된다고 합니다. <내 머리 속의 지우개>(2004) 속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손예진의 아픔이 슬프면서도 멜로적인 아름다움을 선사했다면 이 편은 더 현실적인 체감이 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병을 앓기 전 앨리스는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사는 여성이었습니다. 콜롬비아 대학에서 언어학을 강의하는 저명한 교수이자, 하버드 대학 암세포생물학 교수인 남편, 변호사 큰 딸, 의사 아들, 예쁜 막내딸을 두었으니, 줄줄 읊기만 해도 단박에 성공한 여성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그런 앨리스가 바쁜 일상 속, 저녁 약속을 깜빡 하거나 늘 하던 조리법을 잊어버리는 ‘증상’은 그저 ‘이제 나도 노화가 찾아오는 걸까’ 하는 정도의, 건망증 정도로 보였지요. 하지만 현실은 혹독합니다. 자각증상으로 병원을 찾은 그녀는 자신의 병이 불치병인데다가, 자식에게까지 유전된다는 잔인한 선고를 받게 됩니다. 

 


이 잔인한 운명을 받아들이고 감내해야 할 순간 앞에서 앨리스가 내뱉은 말이 참 인상적인데요. 그녀는 “알츠하이머가 아니라 차라리 내 병이 암이었으면 좋겠어.”라고 절규합니다. 고통스럽고 끔찍하기로는 매한가지일 텐데, 그녀가 차라리 암에 걸리는 편이 더 낫겠다고 한 의미는 무엇이었을까요. 암 역시 힘든 병이지만 사람들에게 동정과 관심을 받는다면, 알츠하이머는 기억을 잃는 정신에 관한 병이라는 점에서 그녀에게 조금 다른 고통이 전가되었던 것입니다. 병마로 인해 자신의 판단 능력을 상실한다는 건, 결국 그녀가 지금까지 견지해 온 삶을 통째로 잃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랑하는 가족조차도 누구인지 인지할 수 없게 될 뿐 아니라, 평생을 인간의 언어를 연구하는데 바친 학자로서의 커리어와 자존심 역시 모두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가족에게 짐이 되지만, 그런 자신이 짐이 된다는 것조차 자각할 수 없는 상태. 그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에 직면한 앨리스는 이렇게 되뇝니다. “내가 사라지고 있는 것 같아” 앨리스가 가진 공포는 결국 병으로 인해 자신이 사람들이 기억하는 과거의 앨리스로 여전히 남아 있을 수 없다는데 있습니다.  



이 지점이야말로 영화의 제목 ‘스틸 앨리스’(Still Alice)의 의미가 명확해지는 지점이 아닐까 싶은데요. 대게 병에 걸린 환자를 다루는 여타의 작품들이 환자를 동정하거나, 환자를 보살피는 이들이 아픔에 초점을 두고 있다면, 이 영화는 조금 다른 시선에서 출발합니다. 바로 앨리스를 객관화된 ‘환자’라는 대상으로 연민하지 않는 것이지요. 영화의 매 장면 빠지지 않고 앨리스가 등장하는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그녀는 자신이 겪고 있는 현실, 그리고 닥쳐올 미래에 대해서 매순간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만큼 의지를 피력해 나갑니다. 우리가 불안과 좌절의 감정을 겪어나가는 그 조용한 ‘사투’를 숨죽여 지켜보는 동안, 앨리스라는 한 여자가 처한 상황이 더 극명하게 부각되고, 또 그녀를 응원하는 마음도 점점 더 커질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이렇게 앨리스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과정 중 하나로, 영화에서 가장 큰 감정의 파동을 불러일으키는 하나의 장면이 있습니다. 바로 정신을 잃기 전의 앨리스가 기억을 상실한 미래의 자신인 앨리스에게 보내는 동영상 편지를 제작하는 장면인데요. 현재의 앨리스는 ‘낯선’ 그녀를 향해, 기억을 잃은 후에는 어떻게 대처할지 차근차근 설명해 줍니다. ‘여전히’ 남편이 사랑했던 아내, 딸과 아들이 기억하는 엄마로 남고자 하는, 환자가 아닌 한 여성의 강한 의지가 눈물겹습니다. 앨리스는 기억을 잃어가고 있고, 언젠가 그 끝이 오겠지만 그녀의 현재는 그래서 마냥 어둡지 많은 않습니다. 알츠하이머 학회에 연사로 참석한 그녀가 잃어가는 기억을 붙들어 힘겹게 작성한 문구를 읽는 순간, 그 의지는 강하게 증폭되는데요. 연단 앞에 선 그녀가 “이 세상의 일부가 되기 위해서, 예전의 나로 남아 있기 위해서 애쓴다. 순간을 살라고 스스로에게 말한다”며 보여주는 결연한 표정은 영화가 끝난 후에도 내내 떠나지 않는 이 영화의 인상입니다. 

 


<스틸 앨리스>의 가장 큰 강점은 드라마틱하게 포장할 수 있는 장면들을 애써 누르고 잔잔한 감정을 따라간다는 점인데요. 이 절제된 연출 스타일의 뒤에는 지난 3월 루게릭병으로 고인이 된 영화의 공동연출 리처드 글랫저 감독의 노력이 있었습니다. 근육이 수축되는 불치병인 루게릭병에 걸린 글랫저 감독은 투병 중 소설 <내 기억의 피아니시모>라는 작품을 읽게 되는데요. 미국 하버드대학교 신경학과 교수 리사 제노바가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할머니를 지켜보면서 집필한 이 책은 31개국에서 출간되어 감동을 준 베스트셀러이기도 합니다. 기억을 잃어가는 소설 속 여인 앨리스가 느끼는 상실감과 또 살아가는 의지를 보면서, 글랫저 감독은 병마로 고통 받는 자신의 삶을 반추한 게 아닐까요? 촬영 도중 병세가 악화되어 몸이 굳고, 성대 근육마저 굳어가 목소리마저 내기 힘든 상황에서도 그는 촬영을 그치지 않고 감행했다고 합니다. 


그 결연한 의지에 힘을 보태 준 건 앨리스의 세포 하나하나까지 놓치지 않고 표현할 정도로 섬세한 연기를 펼치는 배우 줄리안 무어입니다. 그녀는 알츠하이머병으로 고통 받는 앨리스를 연기하기 위해 영화 촬영 4개월 전부터 철저히 준비를 했다고 하는데요. 알츠하이머 관련 책과 다큐멘터리를 보고, 병을 겪고 있는 여성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기도 하였으며, 인지능력 테스트를 체험하는 등 앨리스의 내면에 가까이 가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 병이 진행되는 과정에 따라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헤어스타일과 메이크업, 의상은 물론이고 작은 행동, 어투의 변화까지 모두 다르게 연기했습니다. 바로 줄리안 무어의 연기가 영화를 완성하는 열쇠와 같은 역할을 한 것인데요, 그녀의 이런 노력에 대해 아카데미시상식은 최고의 배우에게 수상하는 여우주연상이라는 보답을 했습니다. 환자이지만, 인간의 존엄을 끝내 잃지 않으려고 했던 모습. 고인이 된 감독이 끝끝내 전하려고 했던 메시지를 다시 한 번 곱씹어 봅니다. 

 







   영화 속 보험이야기 다른 글 보기

  

   ▶ 영화기자가 들려주는 영화 속 보험 이야기<위플래쉬> <바로가기>

   ▶ 영화기자가 들려주는 영화 속 보험 이야기<세인트 빈센트> <바로가기>

   ▶ 영화기자가 들려주는 영화 속 보험 이야기<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 <바로가기>

   ▶ 영화기자가 들려주는 영화 속 보험이야기 <이별까지 7일> <바로가기>








이화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