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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무너진 터널 안에 갇힌 한 남자의 생존이야기 <터널>


요즘은 부쩍 ‘다행이다’라며 가슴을 쓸어 내리는 일이 잦은데요. 부실공사나 관리 미비로 인한 문제, 묻지마 폭행, 테러 소식 등이 끊이질 않고 있습니다. “이번은 내 차례가 아니다”라고 안도해 보지만, 언제 또 사고가 닥칠지 모르는 상황이니 큰 위안이 되지는 않죠. 현실이 곧 재난인 시대여서 스크린도 그 영향을 피해갈 수 없는데요. 확실히 한국영화 시장에도 재난을 소재로 한 영화들이 부쩍 증가하는 추세입니다. 스펙터클한 볼거리를 앞세우고 있지만, 이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사회가 가진 모순을 전하고자 함이 아닐까요? 



최근 극장가의 화제작인 <부산행>의 성공 뒤에는 이 리얼한 현실 반영이 있었는데요. 부산으로 가는 KTX에 할리우드 영화에서나 봤던 좀비가 출몰했다니 사실 그게 말이 되나 싶지만, 영화는 의외로 관객들에게 아주 현실적인 재난의 상황을 전달해 줍니다. 하필 그 시간에 그 기차를 탄 승객이 곧 <부산행>의 피해자이니,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 모두 얼마든지 같은 상황에 처할 수 있다는 것인데요. 무너진 터널 안에 갇힌 남자를 그린 영화 <터널>은 <부산행>에 이어 영화 속 재난이 곧 현실이 될 수 있다는 공포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주는 또 하나의 작품입니다. 




집으로 가는 길, 터널이 무너지다.


<터널>의 피해자는 자동차 영업대리점의 과장 정수(하정우)입니다. 집으로 가던 중 그는 갑자기 무너져 내린 하도 터널 안에 갇히게 되는데요. 가진 것은 78% 남은 배터리의 휴대폰과 생수 두 병, 그리고 딸을 주려고 산 생일 케이크가 전부입니다. 대형 터널 붕괴 사고 소식에 대한민국이 들썩이고 정부는 긴급하게 사고 대책반을 꾸립니다. 터널 안에 갇힌 정수의 절박한 심정과 달리, 터널 밖의 상황은 더 갑갑하기만 합니다. 생존자를 통해 특종을 건지려는 언론이나, 정치적인 목적으로 그를 이용하려는 정계 등 위기 상황 앞에서도 다른 꿍꿍이를 드러내죠. 사고대책반의 구조대장 대경(오달수)이 꽉 막혀버린 터널에 진입하기 위해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보지만 구조는 점점 요원해 보입니다. 더군다나 구조작업으로 인해 중단된 인근 제2터널 공사로 시공업체의 금전적 손실문제도 제기되는데요. 공사가 재개되려면, 구조작업을 포기하는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재난에 대처하는 우리 사회의 현실을 반영하다.


<터널>이 붕괴된 날, TV 뉴스 앵커는 “대한민국의 안전이 또 한번 무너졌습니다.”라는 말로 사고 소식을 전하는데요. 생존자를 둘러싼 상황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무너진 건 터널뿐만 아니라 정수가 중년이 되는 그날까지 열심히 일하고 가정을 꾸려 살아온 국가, 곧 대한민국의 안전체계, 재난대책, 철학적 가치체계 모든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듭니다. 그 과정에서 유독 웃지 못 할 해프닝이 많이 등장하는데요. 가령 사고 현장에 장관이 도착했다고 대경과 구조대 막내만 놔두고, 그분 영접하러 구조대원들이 다 빠져버려 남은 이들끼리 분투하는 장면은 코믹하면서도 다분히 씁쓸한 기분을 안겨주는 장치입니다. 상식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현실의 재난 앞에서 적극적이고 발 빠른 대처를 기대하는 건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데요. 모순으로 가득찬 이 사회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다는 점에서, <터널>이 보여주는 현실 반영적인 성격은 더욱 강해집니다. 


영화에서 그려지는 이 총체적 난국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자연스레 세월호 사건과 그 이후의 대처상황들이 연상되는데요. 영화를 연출한 김성훈 감독은 “원작 소설(<터널>은 소재원 작가의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 졌다)은 세월호 이전에 나왔지만, 내가 시나리오를 쓴 건 그 이후였다. 염두에 두거나 의도했으면 오히려 이렇게 못 썼을 것 같다.”며 세월호 사고는 한국 사회 전체를 흔들었던 참사이고 아직까지 그 영향이 남아 있다. 뭘 만들든 그 자장에서 벗어나기는 힘들 것 같다. 세월호 사건 이전에 <터널>이 만들어졌다면, 삼풍백화점이나 성수대교 사고와 연관 짓지 않았을까. 특정 사건을 다루었다기보다 결국 우리 사회 전반에 깔려 있는 슬픔이 드러난 것이라고 생각한다.”라며 이 상황을 통해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모순들을 짚어나가려 했다는 점을 밝히고 있습니다. 



캐스트어웨이의 톰행크스, 마션의 맷데이먼, <터널>의 하정우의 공통점


<터널>은 사회 비판적인 성격에 앞서, 재난 블록버스터로서도 충분한 재미를 안겨주는 작품인데요. 특히 2차 붕괴 등의 영향으로 내부구조를 계속 바꾸는 터널의 모습과 그 달라진 터널의 상황에 유기적으로 대처하는 생존자의 액션이 주는 공포와 긴장이 효과적으로 그려집니다. 제한된 휴대폰 통화 외에 외부와 거의 소통하지 못하고 터널 안에 갇힌 정수를 연기하는 하정우는 거의 1인극에 가까운 어려운 연기를 소화해 냅니다. 


 

섬 안에 고립된 <캐스트 어웨이>(2000)의 척(톰 행크스)이나 화성에서 구조를 기다리는 <마션>(2015)의 마크(맷 데이먼)와 같은 낙관적인 분위기는 정수의 캐릭터 뿐 아니라, 하정우라는 배우가 가진 기존의 이미지와 겹쳐지면서 더욱 극대화 되는데요. 절망 속에서도 꿋꿋이 버티는 생존자를 통해 감독은 결국 이 사회를 향한 최대치의 희망을 끌어올리려 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 시간, 그 시각에 우리 모두 그 터널을 통과해 사고의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떨칠 수 없는 불안한 대한민국에서 <터널>은 가장 리얼한 스펙터클로서의 기능을 하는 작품입니다.







이화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