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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파괴를 통해 상실감을 이겨내는 제이크 질렌할의 상처 치유법 <데몰리션>


날아가던 비행기 화물칸에서 떨어진 냉장고가 당신의 머리에 떨어질 확률은? 넌센스 퀴즈처럼 들리시겠지만, 놀랍게도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옆에 있던 아내가 그렇게 믿기지 않은 사고로 죽은 이후, 남겨진 남자의 삶은 완전히 초토화됩니다. 얼마 전엔 호텔 야외 수영장 썬 베드에 누워있던 투숙객이 투신자살을 시도한 투숙객에 의해 봉변을 당했다는 기사를 접하기도 했습니다. 불행에도 일정한 패턴이 있어 미리 예측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요. 그게 불가능하기에 불행은 등장 자체가 항상 극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데몰리션>의 데이비스(제이크 질렌할)도 느닷없이 찾아온 불행과 만난 불쌍한 남자입니다. 무수히 많은 날들과 별반 다를 바 없다고 믿었던 어느 하루, 아내와 차를 타고 있던 그가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는 고작 아내의 타박이었습니다. “냉장고에 물 새는 것 좀 고쳐주면 안 돼?” 변명을 할 겨를도 없이, 달려오던 차가 그의 차를 박았고, 함께 차를 타고 있던 아내는 비명횡사합니다. 평범해 보였던 그 하루는, 그렇게 그에게 가장 비극적인 날로 탈바꿈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데이비드가 겪는 진짜 불행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또 다른 성질의 것입니다. 그는 아내가 죽어 힘든 게 아니라 ‘아내가 죽었음에도 슬프지 않은 자신’의 모습을 자각하고, 괴로워합니다. 장인의 회사에서 잘나가는 투자분석가로 살아왔던 지난 몇 년 간, 매일 아침 7시 15분이면 통근열차를 타고 회사에 출근하고, 퇴근 후 최고급 자재와 소품으로 꾸며진 좋은 저택으로 돌아와 휴식을 취하던 그는 갑작스러운 아내의 죽음 이후 자신이 살아왔던 그 삶이 진짜 제대로였는지 반문하기 시작합니다. 평소의 그는 통근열차에서 “뭐 하시는 분이세요?”라고 묻는 허름한 차림의 앞자리 승객의 질문에 대꾸하는 게 귀찮아, “매트리스 외판원이에요.”라고 둘러대던 차가운 스타일의 사람이었으나, 가만히 있는 그 남자를 불러 세워 자신이 아내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속 이야기를 발설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지금 무너져 내린 자신의 심경을 토로하고 들어줄 그 누군가가 필요한, 아주 고독한, 병이 든 상태입니다. 



<데몰리션>에서 그를 치유하는 자는 의외로, 아내의 사고 당일 돈만 날름 삼키고 m&m's 밀크초콜릿을 내주지 않은 병원 판기 회사의 고객서비스 상담사 캐런(나오미 왓츠)입니다. 화풀이 상대를 한참 잘못 찾았나 싶었는데, 흥미롭게도 캐런은 자꾸 편지를 보내는 그를 ‘미친놈’ 취급하는 대신, 성실하게 응답하는 쪽을 택합니다. <데몰리션>의 스토리가 흥미를 구축하기 시작하는 지점인데요. 알고 보니 캐런은 동거하는 남자친구와 잘 맞지 않아 헤어질 궁리를 하고 있으며, 한창 사춘기에 접어든 아들은 엄마와는 대화조차 하려 하지 않아 엄마 역할에도 애를 먹고 있는 상황이었죠. 그녀 역시 지금, 데이비스처럼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할 고민들을 안고 끙끙 앓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녀가 데이비스의 구조 신호가 절박하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 역시 무너져 내리는 그 일상에서 힘겹게 분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렇게 데이비스가 그를 이해해주는 새로운 여성을 만나, 소통하는 걸로 이야기를 마무리 지을 수 있는 그 순간, <데몰리션>은 그곳에 안주하는 대신, 이 이야기를 힘겹게 꺼내놓은 진짜 이유를 발설하기 시작합니다. 그건 데이비스가, 그리고 우리가 얻고자 하는 일종의 삶에 대한 해답 같은 것인데요. 



고통 끝에 그가 도달한 방법은 ‘해체(Demolition)’의 작업입니다. 가지고 있는 온갖 집기는 물론, 기거할 집까지 부수기 시작합니다. “뭔가를 고치려면 전부 분해한 다음 중요한 게 뭔지 알아내야 돼”라는 장인의 말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지요. 데이비스는 다 부셔낸 그곳에서 시작한 새로운 인간관계를 통해 서서히 살아갈 이유를 얻게 됩니다. 


 

그러고 보면 영화를 연출한 장 마크 발레 감독은 항상 이렇게 심적으로 피폐해진 사람들을 몰아세워, 갈 길을 묻고 해답을 구하게 만들어 온 연출자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2013)에서는 론 우드루프(매튜 맥커너히)에게 갑자기 HIV 바이러스 감염이라는 시련을 안겨줍니다. 그가 예정된 선고보다 훨씬 오래 살 수 있었던 건, 고통스럽게 자신의 죽음을 인정한 후 살기 위해 시작한 신약사업에 대한 의지 때문이었습니다. <와일드>(2014)의 중년 여성 셰릴 스트레이드(리즈 위더스푼)에게는 사랑했던 어머니의 죽음과 남편과의 이혼이라는 불행을 안겨줍니다. 자기 키만 한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위험천만한 모하비 사막을 횡단함으로써 그녀는 그 뼈저린 아픔을 극복할 힘을 얻게 되지요. 데이비스의 해체작업 역시, 방법이 다를 뿐 절박함에 있어서 만큼은 그 둘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믿고 있음에도, 데이비드가 무거운 망치로 세차게 벽을 내려칠 때마다 자꾸 현재의 나를 돌아보고 점검하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여러분도 지금의 삶을 해체할, 그 정을, 망치를, 불도저를 마련해 보시면 어떨까요? 물론 진짜 집을 부수지는 말고요. 일단 살살, 마음속으로만 부숴 보는 걸로 할까요?

 






이화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