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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씨네21 이화정 기자가 들려주는 영화 속 보험이야기 <안녕, 헤이즐>


아픔을 인정하기에 더욱 아름다운 영화, <안녕, 헤이즐> 

  


‘어린’ 숫자는 안타깝다. 나이 말이다. 죽음과 어울리지 않는, 가까이해서는 안 될 것 같은 그런 나이 말이다. 너무 이른 죽음에 대해 내가 항상 기억하는 구절은 영화화되기도 한 소설 <러브 스토리>의 첫 문장이다. 백혈병에 걸려 죽고 만 사랑하는 여인 제니를 향해 올리버는 독백한다. ‘스물다섯에 죽은 그녀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너무 빨리, 너무 갑자기 찾아온 죽음 앞에서 우리가 해줄 수 있는 위로는 무엇일까? <안녕, 헤이즐>의 소녀 헤이즐(쉐일린 우들리)을 보면서 <러브 스토리> 속 제니의 죽음이 떠올랐다. 헤이즐은 이제 겨우 18살이다. 외모를 꾸미는데 열을 올리거나, 관심있는 소년에 안달복달하거나, 친구들과 어울려 수다를 떨 나이인데, 그 일상은 전혀 다른 형태로 흘러간다. 수년간 그녀를 괴롭혀 온 혈액암은 그녀의 사춘기 시계를 정지시켜 버렸다. 병원과 집을 오가는 게 행동반경의 전부, 잠깐 이동이라도 할라치면 산소 호흡기를 코에 차고, 휴대용 산소통을 끌고 다녀야 한다. 이미 여러 번 죽음의 고비를 넘기긴 했지만 의사는 복용 중인 약이 듣지 않는다면 그녀가 내일이라도 당장 죽을 수 있다고 경고한다. 





어리고 여린 헤이즐의 절망에 대해서 어떤 말을 보탤 수 있을까? 과연 그런 말이 있기나 할까? 문득 제 또래의 남녀가 서로 애정을 나누는 걸 부러운 듯 바라보는 소녀에 대해서, 곧 죽을 딸을 돌보며 몰래 눈물을 삼키는 엄마의 마음을 짐작하고 있는 소녀에 대해서, 때로 그 고통 때문에 가까이 있는 부모에게 투정할 수밖에 없는 소녀에 대해서, 섣부른 위로의 말을 건네는 것도 조심스러워질 밖에 없다. 딱딱한 껍질에 쌓인 채 잔뜩 웅크린 헤이즐의 마음을 단박에 열어 준 건 놀랍게도 ‘사랑’이었다. 자꾸 냉소적이 되어가는 딸을 걱정한 엄마의 강권에 못 이겨 암환자 모임에 참석한 헤이즐은 그곳에서 동갑 소년 어거스터스(안셀 엘고트)를 만난다. 흔히들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할 때 첫눈이 3초라는 말이 있던데, 헤이즐이 센터의 입구에서 동갑의 소년 어거스터스에게 반한 게 딱 그 3초 정도다. 큰 키에 떡 벌어진 어깨, 멋진 미소, 매너라니! 그는 ‘선수’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겉으로는 이렇게 ‘멀쩡’하지만 막상 어거스트 역시 헤이즐과 마찬가지로 아픈 소년이다. 골육종으로 대수술을 받고 다리 한쪽을 절단했음에도, 신기하게도 그에게는 보통의 환자같은 구석이라곤 없다. 평범한 십대가 하는 것이라면 객기에 불과할 지라도 그는 일단 무조건 다 해봐야 직성이 풀리는 소년이다. 가령 이런 것이다. 아픈 주제에 담배를 피려고 하는 어거스터스에게 헤이즐이 핀잔을 주는 장면이 있다. “불 안 붙였어. 이건 상징적인 행동이야. 사람을 죽이는 물건을 입에 물지만, 날 죽일 힘은 주지 않는.” 어거스터스의 대답은 이 정도로 당차다. 매사 쾌활하고 능수능란하고 저돌적인 그는 헤이즐에게 닥친 죽음의 그림자를 잠시나마 잊게 해줄 일종의 비타민 같은 남자다. 





<안녕, 헤이즐>은 이렇게 서로를 이해하는 헤이즐과 어거스터스가 절망 속에서 가꾸는 풋풋한 첫사랑의 이야기다. 어거스터스 앞에서라면 헤이즐도 티격태격하며 데이트를 즐기는 여느 평범한 십대들처럼, 고통을 내려놓고 솔직해 질 수 있다. 어거스터스의 도움으로 둘은 급기야 평소 헤이즐이 좋아하던 작가를 만나러 암스텔담에 가게 되는데, 어쩌면 생애 마지막이 될지 모를 이 여행은 어느 누구의 화려한 여행보다도 그래서 더없이 아름답고 애틋하다. 영화는 2012년 미국에서 큰 인기를 모았던 존 그린의 소설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The Fault In Our Stars)>를 원작으로 만들어졌다. 출간 전에 이미 영화화 판권 계약이 추진되었는데, 영화사의 선견지명이 맞아떨어졌다. 개봉 후 블록버스터의 홍수 속, 자극적인 양념을 하지 않은 잔잔한 십사랑 이야기는 십대들의 지지와 눈물 세례를 받으며 박스오피스를 휩쓸었다. 영화의 인기에 힘입어 헤이즐과 어거스터스가 앉았던 영화 속 암스텔담 거리의 벤치를 도난당했다는 웃지 못 할 해프닝도 있었을 정도다.(세상에나, 그걸 뽑아 간 것이다!) 


신드롬에 가까운 이 열기는 무엇일까? 소설을 각색한 각본가가 로맨틱 코미디의 화제작 <500일의 썸머>의 작가인 스콧 뉴스타드터와 마이클 H 웨버의 도움이 컸다. 헤이즐의 아픈 내면을 기술하는 방식은, <500일의 썸머>에서 그들이 평범한 남녀가 경험하는 만남과 이별의 속성을 예리하게 정의했던 방식과 많이 닮아 있다. 이번엔 로맨틱한 십대들의 사랑을 바탕으로 원작의 이야기에 담긴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을 조곤조곤 풀어놓는 것이다. 헤이즐은 늘 ‘죽음’을 곁에 두고 자란 소녀다. 그녀가 가진 삶의 모토는 평소 좋아하는 소설 <거대한 아픔> 속 구절인 ‘고통은 느껴야 해’였다. 시한부라는 절망은 아무리 거부하려고 해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다. 어리지만 헤이즐은 그걸 깨닫고 받아들이고 있다. 그녀가 “암으로 죽어가는 것보다 힘든 건 자식이 암으로 죽어 가는걸 보는 것이다”라고 엄마의 아픔을 느끼는 순간, 간신히 참았던 눈물이 후두둑 쏟아진다. “네가 죽으면 우리는 가슴이 찢어지겠지만…….그래도 살아가겠지.”라는 엄마의 말이 더해지면, 이 영화가 그저 말랑말랑한 십대 소녀의 판타지가 아닌, 삶의 격렬하고 비통한 진짜 투쟁임을 불현듯 깨닫게 된다. 





주목할 것은 헤이즐과 어거스터스가 서로를 만나 잠시나마 이렇게 ‘쓴 세상’에 해독을 해주는 지점이다. 헤이즐이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 사랑에 머뭇거리자 어거스터스는 “살면서 상처를 받을지 안 받을지를 선택할 수는 없지만, 누구로부터 상처를 받을지는 고를 수 있다. 난 내 선택이 좋다. 그 애도 자기 선택을 좋아하면 좋겠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의 한결같고 용감한 구애에 마음을 연 헤이즐은 “넌 나한테 한정된 나날 속에서 영원을 줬고, 난 거기에 대해 고맙게 생각해.”라고 감사를 표한다. 마찬가지로 헤이즐도 어거스터스에게 위로가 되어준다. 쾌활한 척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역시 ‘세상은 소원을 들어주는 공장이 아니다’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그래서 “내가 죽은 후 사람들에게 잊혀지는 것, ‘망각’이 두렵다”고 하는 어거스터스를 향해 헤이즐은 “여러 사람에게 기억되는 것보다 한 사람에게 기억되는 것이 더 중요해.”라며 그 두려움을 다독여 준다. <안녕, 헤이즐> 속에는 이렇게 그저 어린 시절, 누구나 통과하는 첫사랑이라고 하기에 너무나 큰 삶과 죽음의 철학이 오고간다. 너무 이른 나이에 우주의 섭리를 알아버린 이 작은 소년, 소녀에게서 어른인 내가 할 수 있는 건 위로대신, 그저 큰 깨달음일 뿐이다. 






 





이화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