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라이프

까칠한 남자 오베의 고독 치유 이야기 <오베라는 남자>


고독사는 우리 사회에서도 더 이상 낯설지 않은 문제인데요. 특히 나이가 들면서 평생을 해오던 일을 그만두게 되고, 또 늘 함께 해오던 반려자가 떠나게 되면서 겪는 상실감은 상상할 수 없겠지요. 사람이 받는 스트레스 중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배우자의 죽음이라는 조사를 보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자신을 가장 가까이서 이해해 줄 존재가 사라졌다는 것에 대한 허전함이 크다는 증거인데요. 한창 일할 나이의 자식들은 늘 제 일로 바쁘기 마련이고, 결국 옆에서 그 심경을 이해해 줄 사람이 없다는 것도 문제겠지요. 이런 소외감을 극복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 복지 시설조차 제대로 마련되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다 보니 노인들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생기는 불안감, 우울함을 안고 점점 혼자만의 벽을 쌓게 되는데요. 흔히들 말하는, ‘괴팍스러운’ 노인은 이런 우울함에서 출발하지 않았을까요. 영화 속에서도 이 외로움을 그린 경우가 많은데요. 대개 이해 못할 까다로운 성격, 모나고 고집불통인 노인들을 통해서 그들을 이해하려는 시도를 하게 됩니다.



잭 니콜슨이 주연한 <어바웃 슈미트>가 대표적이죠. 평생 보험회사에 근무하며 출퇴근을 하던 슈미트는 퇴직 후 공허함을 이기지 못합니다. 함께하던 아내마저 죽으면서 외로움이 커지는데, 그는 그 상황에서 맘에 안 드는 남자와 결혼하려는 딸을 훼방 놓으려 심술을 부립니다. 고집불통에 제멋대로인 성격의 슈미트가 캠핑카를 타고 여행을 하는 동안 사람들과 다툼하고 부대끼는 과정에서 다시 희망을 찾아가는데요. 슈미트 같이 못 말리는 노인으로는 <그랜 토리노>의 월트도 만만치 않습니다. 월트는 아내가 죽고 이웃과 소통하지 않은 채 사는 깐깐한 노인입니다. 명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연기가 그의 고집스러움을 완벽하게 재연하는데요. 월트가 아끼는 72년산 자동차 그랜 토리노를 훔치려 하던 이웃집 몽족 소년 타오를 얼떨결에 도와주면서, 시끄러운 이웃들과 얽히게 되고 ‘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누구와도 소통하지 않는 남자 오베 


주변 누구와도 소통하지 않겠다는 이들의 굳은 결심이 무색하게도 모두 자신을 괴롭힌다고 믿는 사람들로 인해서 마음을 열게 되는 과정이 흥미롭습니다. 그렇게 모두 외로움을 표현하는 방법을 몰라서, 누군가가 마음을 문을 열어주길 바라서가 아닐까요. 스웨덴 영화 <오베라는 남자>의 오베 역시 앞선 두 인물들과 비슷한 상황에 처하게 된 노인입니다. 



59살의 남자 오베는 젊은 시절부터 몸담았던 직장에서 해고당했고, 주변 인물들과는 영 어울리지를 못 합니다. 너무 원칙주의자에 고집불통인 오베의 성격이 이 불협화음을 부추긴 것 같다는 생각도 드는데요. 가령 이렇습니다. 죽은 아내의 무덤에 가져갈 꽃을 사는 장면을 보면, 새치기하는 사람에게 따끔하게 "뒤로 서시오"라고 윽박지르며, '두 다발에 70크로나'하는 꽃을 한 다발만 사려면 35크로나가 아니라 50크로나를 내야 한다는 점원의 말에 "소비자 고발원에 고발할 거"라며 으름장을 놓습니다. 이런 그의 눈엔 동네 주민들 모두가 못마땅한 존재입니다.


길거리에 꽁초를 함부로 버리는 것도, 집 앞에 오줌을 싸는 옆집 개도, 분리수거를 제대로 하지 않는 주민도, 자전거를 제대로 주차하지 않는 청년도 모두 그의 레이더망에 포착되면 핀잔을 듣기 일쑤입니다. 지역주민 회장직에서 몇 년 전 물러섰지만, 그는 여전히 동네의 질서를 관리하는 사람으로 역할하며 이 마을이 질서를 유지하길 바랍니다. 그의 이런 '오지랖'을 두고, 동네 주민은 '노망난 할아버지'라며 손가락질을 하는데요. 지켜보는 관객이야 이 상황이 재미있기도 하지만, 사사건건 똑바로 하라고 시비를 거는 오베와 옆집에 산다면 또 이야기가 달라질 것 같네요.


그런데 말입니다. 진짜 심각한 건 오베가 이 ‘성가신’ 세상을 등지고 결별을 하려는 자살시도를 한다는 데 있습니다. 죽은 아내를 향한 그리움이 그 이유인데요. 이 영화가 재미있는 건, 매번 오베가 자살을 시도할 때마다 번번이 불발된다는 것에 있습니다. 



첫 번째 자살시도 때는 그가 목을 매려는 순간, 맞은편 집에 이사오는 이란 이민자 가족이 그의 심기를 거스릅니다. 이삿짐 차를 제대로 주차 시키지 못해 오베의 집 우체통이 찌그러지게 되고 예의 심통이 발동한 오베는 그들에게 훈계를 하느라 자살시도를 뒤로 미룹니다. 이후 여러 차례 오베의 자살시도는, 실행직전 아버지에게 쫓겨난 청년이 잠자리를 내어 달라고 해서, 앞집의 파르베네가 남편이 다쳤다며 병원에 함께 가달라고 해서 중지됩니다. 오베가 그렇게 못마땅해 했던 주민들이, 매번 그를 살려준다니 이렇게 아이러니한 상황도 없지 싶습니다. 


<오베라는 남자>가 흥미롭게 다가오는 지점은, 이런 웃지 못할 상황 속에 오베라는 이 남자에게 비밀이 존재하고 있다는 점 때문인데요. 거기에는 유년기부터 오베에게 닥친 불행의 그림자가 함께 하고 있습니다. 어머니께선 일찍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사고로 뜻하지 않은 죽음을 맞이합니다. 


혼자가 된 청년 오베는 슬퍼할 겨를도 없이 연이어 화재로 집을 잃는 불행까지 닥치는데요. 이 모든 역경 속에서 찾은 진정한 사랑인 아내와 행복하게 살고 싶지만, 또 다른 불행한 사고가 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베는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들과 아픈 이별을 해야 했던 이유. 그리고 불행한 사건이 벌어진 이유가 너무도 쉽게 원칙을 지키지 않았던 사람들 때문에 벌어진 참사임을 알게 됩니다. 오베의 괴팍스러운 성격 뒤에는 사람들의 부주의로 인한 사고, 재난에 대처가 제대로 되지 않아 인해 무고한 사람들이 다쳐야 했고, 피해자가 되어야 했던 불행했던 과거가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오베가 마음을 여는 계기는 앞집에 이사 온 여성 파르베네(바하르 파르스)의 ‘귀찮을 정도’의 관심 때문입니다. 오베를 향한 마을 사람들의 못마땅한 시선에도 불구하고, 멀리서 이사 온 파르베네는 그 시선에 개의치 않고 그에게 다가갑니다. 오베도 그 요구가 싫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겉으로는 마다하면서도 파르베네가 가져다 주는 낯선 이란 음식을 마지못해 먹고, 그녀의 남편이 다쳐 응급실에 갔을 때는 졸지에 그 아이들을 돌봐주는 임무까지 수행해 내니 말입니다. 



결국 오베는 다른 사람들에게 털어놓지 못 했던 자신의 아픈 과거를 그녀와 소통함으로써 하나씩 치유해 나가게 됩니다. <오베라는 남자>는 프레드릭 배크만의 베스트셀러 소설이 원작으로, 자국 스웨덴에서 큰 인기를 얻은 작품입니다. 자칫 무거울 수 있는 소재이지만, 영화는 유머러스한 시선과 잔잔한 이야기로 감동을 이끌어 냅니다. 외면하기에 앞서, 람과 사람 사이에 손을 내밀어 준다면 서로 이해를 구할 수 있다는 따뜻한 충고. <오베라는 남자>가 전해주는 이 소통의 방식을 여러분께도 추천 드립니다.

 






이화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