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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과거의 상처를 피해 도망다녔던 한 남자의 새로운 인생 페이지, <맨체스터 바이 더 씨>


‘상실’은 어떤 얼굴을 하고 오는 걸까요.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 아마 상실의 시간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할 텐데요. 그 두려운 시간을, 우리 모두 굳이 미리 상상하고 싶어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될 수 있는 한 뒤로 미뤄두었던 상실의 경험이 막상 자신 앞에 다가오는 걸 막을 길은 없습니다. 어느 날 상실의 실체가 송곳 같은 그 형체를 드러내고 다가와 연약한 가슴을 갈갈이 찢어낼 때, 그 상처의 깊이는 또 얼마나 될까요. ‘시간이 치유해줄 수 있을 거’라는 흔한 위로의 말이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되면 좋으련마는. 불행이라는 것이 그리 호락호락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지금 들여다보려는, <맨체스터 바이 더 씨>의 리 챈들러(케이시 애플렉)는 그런 고약하고도 아픈 사연을 가진 남자입니다. 


겨울이 유독 추운 보스턴. 리는 남의 집 눈을 치워주고, 막힌 변기를 뚫어주는 등 온갖 허드렛일을 하며 잡역부로 살아갑니다. 하는 일에 비해, 수당이나 처우가 턱없이 부당해 보이지만, 딱히 그 일을 그만둘 것처럼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가 보스턴을 떠나는 건 형의 부고를 듣고서인데요. 희귀한 심장병을 앓던 형이 죽었다는 소식에, 그는 며칠 휴가를 쓰고 차로 2시간 걸리는 작은 어촌 마을 ‘맨체스터 바이 더 씨’(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실제 미국 북동부에 있는 지명입니다. 1989년 맨체스터와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마을 주민의 투표로 지금의 지명으로 자리했다고 합니다.)로 향합니다.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는 것은 인자했던 형의 주검, 그리고 형이 남기고 간 아들 패트릭(루카스 헤지스) 뿐입니다. 알코올 중독이었던 형수는 이미 집을 떠난 지 오래였고, 이제 보호자 없는 조카는 그가 돌보아야 할 ‘짐’이 된 상황입니다. 



이 영화의 본론은 리가 맨체스터 바이 더 씨에 들어서면서부터 시작되는데요. 형을 찾아 병원에 가고, 장례 절차를 밟기 위해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또 혼자 남은 조카를 어떻게 돌볼지 구체적인 안을 세워야 하는 동안, 한때 이곳에서 살았지만 지금은 보스턴으로 떠난 리의 과거, 그 숨기고 싶었던 사연이 하나 둘씩 고개를 들고 나오게 됩니다. 리는 떠올리고 싶지 않지만, 과거의 기억은 맨체스터 바이 더 씨라는 공간과 엮여 그를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합니다. 


한때는 그도 세 아이를 둔 그저 평범하고 단란한 집안의 가장이었습니다. 그가 이 마을을 떠들썩하게 했던 비극적인 사고의 주인공이었다는 건, 그래서 도망치듯 이곳을 떠나야했다는 건, 그리고 가능한 한 이곳에 돌아오고 싶지 않아했다는 건, 불쑥불쑥 삐져나온 기억의 파편을 통해서 조각 맞춰집니다. 자신이 저지른 끔찍한 실수와 그로인해 사랑하는 사람을 모두 잃어야 했던 상실의 기억 속에서, 리는 굳게 마음을 닫아야 했던 것이지요. 좀체 웃는 일이라곤 없는 그는, 남들이 그에게 면죄부를 줄 지언정, 자신은 그럴 수도 그래서도 안된다고 생각하고, 스스로에게 형벌을 가합니다. 이곳에서 리는 이제는 헤어진 전 부인 랜디(미쉘 윌리엄스)를 만나게 되는데요. 그녀가 리를 향해 하는, “마음이 너무 아팠어. 앞으로도 그럴거니까. 당신 마음도 아프다는 거 알아.”라는 말이 아마, 그들에게 닥친 불행과 그로 인해 파괴된 현재, 그리고 그 죄책감으로 인해 평생 극복하지 못할 암울한 미래까지 모두 말해주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인상적인 건 리의 눈길이 닿는 마을 곳곳, 아름다운 해변이 있는 마을은 인간의 불행과는 무관하게 너무나도 아름다운 목가적인 풍경을 자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우리가 흔히 예상하듯이 상실 후의 극복을, 살아갈 용기를, 따뜻한 치유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당사자가 아닌 우리가 그의 상황에 과연 어떤 위로의 말을 건넬 수 있을까요. 케네시 로너건 감독은 섣부른 희망의 언어를 건네는 게 너무 영화적으로 만들어낸 결론이 될거라는 걸, 절감하게 만들어 줍니다. 무표정하게 굳은 표정의 리를 보면서 그가 가진 마음의 병이 얼만큼인지, 치유가 가능할지 헤아리기조차 힘든데요. 


 

대신 리의 현재를 움직이게 하는 사건인 아버지를 잃은 조카 패트릭의 상태를 보면서 리의 마음을 십분의 일이라도 짐작해 볼 따름입니다. 16살 사춘기라 더 짐짓 어른이 된 척 하고 싶은 ‘아이’는 자신이 갑작스런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의연한 것처럼 행동합니다. ‘난 다 컸어. 이런 것쯤이야. 누구의 보호도 필요 없어.’ 아마 이렇게 마음을 꽁꽁 포장해, 상처를 숨기고만 싶었겠지요. 하지만, 땅이 얼어 묘를 팔 수 없어 아버지의 시신을 냉동해야 하는 그 며칠 동안 사실 소년의 마음은 그렇게 얼어버렸는지도 모릅니다. 집안에서 냉장고문을 열다 냉동닭을 떨어뜨린 그는,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하는데요. 그를 다독여 주는 리 역시, 꽁꽁 언 마음을 녹일 그런 시간이 절실하게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집니다. 영화의 말미, 리가 수리를 하러 간 집에서 한 할아버지는 ‘드라마틱한 사건 사고도 없이 어느날 갑자기 돌아오지 않았던’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들려주는데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게 될 상실이라는 피할 수 없는 이 ‘평등한’ 명제에 대해서 더 없이 깊은 생각을 하게 만들어주는 지점입니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할리우드 배우 맷 데이먼이 제작을 해 화제를 모은 작품이기도 한데요. 절친한 사이인 배우 조 크래신스키와 대화를 나누던 중 ‘보스턴에 사는 한 남자가 뭔가 끔찍한 일이 생겨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만들어보자는 한 줄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만들었다고 합니다. 직접 연출과 주연 리 역할까지 하겠다는 포부를 가졌으나 <마션>(2015)의 출연과 일정이 겹치면서 연출은 <유 캔 카운트 온 미>(2000)를 연출한 케네시 로너건 감독에게, 주연 리의 역할은 벤 애플렉의 동생이기도 한 케이시 애플렉이 맡게 되었는데요. 케이시 애플렉은 앞서 열린 골든 글러브 시상식 남우주연상 수상과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로 선정되며 호평 받은 작품입니다. 


이화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