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의 봄을 맞는게 유독 더디고 쉽지 않습니다. 눈앞을 뿌옇게 하고 목을 케케하게 만드는 미세먼지도, 연일 전해져오는 시국도 감당하기 만만치 않은 뉴스 투성이입니다. 저는 봄이 오는 길목에서 많은 시간을 함께 나누었던 외삼촌과 이별을 해야 했습니다. 외삼촌의 갑작스런 췌장암 말기 선고 후 병원과 집을 오가는 가혹한 날들이 지속되었습니다. 잠깐 기력을 회복하셨던 지난 겨울, 마당 밖에 가꾸어둔 화단을 바라보던 모습이 어제처럼 기억납니다. 외삼촌은 “새로 모종을 많이 심어서 봄이 되면 정말 많은 꽃들이 필거야.”라고 창밖 너머를 바라보며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봄꽃을 보면서 웃을 수 있는 날이 오길. 가족 모두가 올 봄을 기다린 이유였습니다. 그렇지만 외삼촌은, 기어이 ‘제발 기운을 차려 달라’는 바램을 등지고 얼마 전 거짓말처럼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행복 목욕탕>을 보면서 집안 곳곳 외삼촌의 흔적과 맞딱드리며 힘든 시간을 보내는 작은 어머니께는, 그리고 남동생을 잃어 실의에 빠진 엄마에게는 이 영화를 보여드리지 말아야겠다,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이 영화의 후타바(미야자와 리에)를 보면서 혹여나, 두 분이 더 깊은 상심에 빠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죠. 30대 후반 정도로 밖에 안보이는 젊은 여성 후타바 역시 어느날 갑자기 췌장암 말기 선고를 받고 고군분투하게 됩니다. 갑자기 예고도 없이 그녀의 운명이 달라지는 날이지만, 이런 비극적인 선고는 짖꿎게도 여느날과 똑같은 평범한 상황에서 찾아옵니다.
후타바는 함께 사는 딸에게 자신의 병을 알리지 않습니다. 남편 가즈히로(오다기리 조)는 일 년전 가족에게 아무말도 남기지 않고 잠적을 한 상태라, 그녀는 가족이 함께 운영하던 목욕탕을 휴업하고, 제과점에 취직해서 돈을 벌고 있던 차였습니다. 중학생인 딸 아즈미(스기사키 하나)는 아즈미 나름대로 힘든 시간을 버티고 있었습니다. 바로 학교에서 아이들의 따돌림에 시달리고 있었던 거지요. 후타바는, 자신의 죽음에 대한 걱정보다 그러니까 ‘탈 많은’ 가족들을 돌보지 못하고 남겨두고 가는게 아마도 더 걱정이 되었지 싶습니다. 결국 사립탐정을 고용해, 자신이 죽고 나서도 딸을 돌봐 줄 집나간 남편을 찾아냅니다. 무책임한 가장인 가즈히로는 다른 여자와의 사이에서 낳은 어린 딸과 함께 단 둘이 살고 있던 터였는데, 후타바의 부름으로 이제 다시 고향에 오게 됩니다.
여기까지가 그러니까 1년 동안 방치되어 있던 낡은 목욕탕이 ‘개인적인 사정으로 쉽니다.라는 팻말을 떼고 다시 영업재게를 하게 된 사연인데요. 물론 남편은 후타바에게 “도쿄에 있는 더 큰 병원에 가면 분명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라고 설득을 해봅니다. 하지만 후타바의 태도는 단호합니다. “좀 더 살아보겠다고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는 건 싫어.” 암선고를 받은 후 그녀가 거동을 하지 못해 병원에 입원하기까지, 후타바는 씩씩하게 기운을 잃지 않고 목욕탕 운영에 전념합니다. 목욕탕을 쓸고 닦는 일부터, 아즈미가 자신을 괴롭히는 아이들에게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설 수 있도록, 남편이 데리고 온 어린 딸이 낯선 환경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하는 것도 그녀의 평범한 일과 중 하나였지요.
어린 딸들도 이런 후타바를 함께 도와줍니다. 한편으로는 아즈미에게는 그녀가 몰랐던 출생의 비밀이 있는데, 후타바는 그런 그녀를 위해 마지막 여행을 떠납니다.
목조건물의 작은 목욕탕, 동네 사람들을 하나하나 알아보고 동전을 거슬러주는 낡은 카운터, 조악한 후지산 그림이 그려진 욕탕 벽면, 하얀 수증기가 뿜어져 나오는 굴뚝까지, 어쩜 가족들이 다함께 운영하는 낡은 목욕탕은 그렇게 한번쯤 가보고 싶게 정겹기만 할까요. 화면을 보는 것만으로도 장작불로 데운 목욕탕의 따뜻한 물 온도가 전해져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요. 가족들이 함께 ‘샤브, 샤브’하고 귀엽게 외치면서 고기를 넣고 휘휘 국물을 저어 샤브샤브를 먹는 식사 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날이 갈수록 후타바는 병색이 짙어지고 수척해지지만, 가족들이 함께 하는 자리에서는 최대한 내색을 하지 않습니다. 왜 안 아팠을까요. 왜 슬프지 않았을까요. 아즈미가 병실에 누워있는 엄마를 보러갈 때 억지로 울음을 참는 장면이 비춰지는데요. 아마 이 ‘따뜻함’의 정체가 여기 있다 싶습니다. 가족 모두 감당할 수 없는 비극을 안고 있지만, 서로를 힘들지 않게 하고 싶은 마음. 사랑이라는 장작이 있기에 발산하는 따뜻한 물온도가, 그나마 이 힘겨운 날들을 버텨나가게 하고 꿋꿋하게 살아가게 하는, 차가운 슬픔을 녹이는 정체가 아니었을까요.
아직 한창 활동을 할 나이의 외삼촌은, “이번에 회복하면 다시 일을 하겠다”며 다짐을 보여 가족을 안심시키는 한편,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남은 이들을 위한 준비를 하셨습니다. 작은 어머니가 그러더군요. “서랍을 열어보니, 공인인증서 비밀번호니 뭐니 이런 것들을 모두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았더라고.” 몰래 그렇게, 우리는 감당할 수 없는 자신의 아픔 앞에서도 남아 있는 사랑하는 이들을 먼저 아껴줍니다. 제게도 이제는, 기억이 닿는 유년기부터 항상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던 인자했던 얼굴의 외삼촌을 오래오래 기억하는 일만이 남았습니다. 올 봄은 그렇게, 많이 슬프지만 남은 이들과 그 기억을 공유하며 따뜻하게 보내보려 합니다. 쉽지 않지만 여기 이렇게, 그 떠나보냄의 시간을 남겨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