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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자식에 대한 지나친 기대가 낳은 비극 <사도>

 

영조 38년. 사도세자는 영조의 명으로 8일 동안 뒤주에 갇혀 있다 굶어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당시 사도의 나이 27세에 불과했습니다. 왕에게 죽임을 당한 세자라는 이 전례 없는 사건이 바로 조선 역사상 가장 비운의 사건으로 기록된 임오화변인데요. 오랫동안 이 사건의 자초지종은 사도의 정신질환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고 규정되어 왔습니다. 


사도의 부인이었던 혜경궁 홍씨가 기술한 <한중록>에는 사도가 생전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고 그 광기가 결국 아버지 영조와의 불화로 이어지며, 죽음까지 이르렀음을 자세히 밝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기술은 오랜 후 반박을 불러왔는데요. 이인화의 소설을 영화화한 <영원한 제국>(1994) 이나 역사학자 이덕일(한가람 문화연구소 소장)은 저서 <사도세자의 고백>을 통해서 <한중록>의 이 같은 주장을 다르게 바라봅니다. 사도세자는 노론과 소론이 팽팽히 맞서던 당시 정치 상황에서 자기 뜻을 펼치지 못하고 죽어간 희생양으로 해석됩니다. 북벌을 꿈꾸던 사도세자는 문무에 출중하고 성군의 자질을 가지고 있었지만, 청나라와 결탁한 노론세력에 암살당했다는 설인데요. 지아비를 잃은 가련한 여인으로 묘사되어 온 혜경궁 홍씨는 이같은 관점에서 보면 친정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기 위해 부군인 사도를 폄해하고 나선 권력 지향적인 인물로 그려집니다. 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싼 해석은 여전히 결론이 나지 않았지만, 뒤주 안에 갇힌 그 8일간의 숨겨진 기록은 작가들의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소재입니다. 해석이 분분한 만큼 수많은 소설과 드라마, 영화를 통해서 임오화변이 재해석되고 묘사하는 이유 입니다.


 

최근 500만 관객을 동원하며 화제가 된 영화 <사도>는 기존 사도를 둘러싼 다양한 해석을 다시 한 번 살펴볼 기회를 제공합니다. 광기에 사로잡힌 사도, 정치적 분쟁으로 희생양이 된 사도와 같은 기존의 묘사와는 조금 다른 관점이 제시되는데요. 바로 사도를 중심으로 아들을 뒤주에 가두고 죽게 한 아버지 영조, 그리고 뒤주에 갇혀 죽어간 그 아버지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어린 시절의 정조로 이어지는 비극의 사건을 삼대를 통해 얽힌 ‘가족’의 이야기에 초점을 두고 흥미롭게 풀어나가는 것입니다.


영화의 시작에서 사도(유아인)는 칼을 들고 아버지 영조(송강호)가 있는 경희궁을 향하는데요. 영조는 사도가 이미 자신의 관을 짜두고 자신을 죽이기 위해 위협적으로 다가온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런 그를 왕을 해하려 하는 나라의 역적으로 몰아붙입니다. 그 일로 사도는 영조의 명으로 뒤주에 갇혀 옴짝달싹 못 하게 됩니다. 사도가 뒤주에 갇힌 때는 찌는 듯한 7월의 더위 한가운데였습니다. 물 한잔 먹을 수 없던 그가 바짝바짝 입이 말라가고, 급기야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혹독한 과정. 관객들은 이 잔인하고 무시무시한 전개를 숨죽여 지켜볼 수밖에 없는데요. 역사가 증언하는 바에 따르면, 사도는 좁은 뒤주에 갇힌 채 8일 후 싸늘한 주검으로 아버지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 그 ‘정해진’ 비극적 결말을 향해 급박하게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영화는 부자가 그렇게 극단적 상황에 부닥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과거의 회상을 통해서 하나하나 재구성 해 나갑니다. 노년이 되어 주름 가득한 영조의 얼굴은 이제 왕성하게 활동을 하던 42세, 사도가 태어나던 때로 되돌아갑니다.


원래 세자는 손이 귀한 왕조에 영조가 늦은 나이에 얻은 귀하디 귀한 아들이었습니다. 2세 때 벌써 글자를 깨우치고 쓸 줄 알았던 영특한 아들이어서 아버지 영조에게 사랑을 독차지한 세자였습니다. 그런 그가 자라면서 무와 예술에 더 관심을 두게 되었고 학문을 조금씩 멀리하게 됩니다. 학문이 나라의 기틀을 세우는 것이라고 여겼던 영조는 서책을 멀리한 자유분방한 아들이 영 마음에 들지 않게 되었고, 사도 역시 자신을 끔찍이 아끼던 아버지의 애정이 점차 식어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영조가 사도에게 아버지로서 큰 기대를 건 데는 왕위계승을 둘러싼 과정에서 영조가 가졌던 자신의 콤플렉스에서도 기인하는데요. 천한 무수리 출신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그는 재위 기간 내내 형인 경종을 독살설의 의혹을 받았고 노론의 도움으로 왕좌에 올랐다는 데서 오는 정통성 논란에 시달려 왔기 때문에 늘 불안함을 안고 살았던 왕입니다.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영조는 조선의 그 어느 왕보다 집권 내내 학문을 연마하고 모든 것에 완벽을 기하려고 노력해 온 왕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어렵게’ 왕좌를 지켜온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학문보다는 무예에 뜻을 보이는 세자의 행동이 쉽게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러던 중 영조 25년(1749)에 대리청정이 시작되는데, 그는 아들을 믿고 지지하는 대신 정무능력을 탓하며 사사건건 제동을 걸게 됩니다. 거듭되는 불화는 부자간의 갈등의 골이 점점 깊어지게 되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하게 됩니다. 영화에서는 이런 두 사람의 관계를 보여주는 결정적인 대사가 나오는데요. 뒤주에 갇힌 사도를 두고 영조는 “이것은 나랏일이 아니고 집안일이다”라는 말로 일갈합니다. 사도 역시 이에 뒤지지 않고 맞서는데요. 그는 “언제부터 나를 세자로 생각하고 또 자식으로 생각했소.”라며 아버지를 향해 참고 참았던 울분을 표명합니다


 

지금으로부터 몇백 년 전 왕가에서 일어난 사건이지만, 영화 속에 표현된 영조와 사도의 행동, 대화는 세대 간의 차이로 갈등을 겪고 있는 지금의 부자 관계에 적용해 보아도 크게 무리가 없어 보입니다. 영화를 연출한 이준익 감독은 이 비극의 역사에 대해 관객이 공감하고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것은 바로 이들의 갈등이 지금 우리 시대에도 유효한 문제임을 전하려 합니다. “자식이 잘해야 아비가 산다.”며 아들을 몰아붙이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의 강압적 요구에 부담을 느끼고 점차 소통하지 못하고 엇나가는 아들의 문제로 본다면, 이들의 상황은 정치적 쟁점이 아닌, 관계를 제대로 풀어내지 못한 심리적인 요소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인데요. 이렇게 이들의 관계를 현대적인 상황으로 해석할 수 있게 하는 데는 사극의 전형적인 말투에서 벗어나 영조의 면모를 새롭게 해석하고 연기한 배우 송강호와 사도가 가진 애잔함에 공감을 더하며 합을 맞추는 유아인의 공이 큽니다.


 

‘사도’는 생각 사(思), 슬플 도(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세자 생전의 이름이 아니라 영조가 아들을 뒤주에 가두어 죽인 후 세자에게 하사한 시호입니다. '생각하면 슬프다'라는 의미로 볼 때, 어쩌면 제 손으로 아들을 죽인 자신에 대한 일종의 변명이 섞여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사뭇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닫기 전 그들이 서로 소통하였다면 이런 슬픈 시호는 만들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왕과 후계자라는 구도를 벗어난 해석은 물론 역사적 사실들을 기반으로 유추해 낸 가정입니다. 하지만 이준익 감독은 이 끔찍한 사건에 대해 ‘왜’라는 물음 대신 ‘어떻게’라는 관심을 조금 더 기울여 봅니다. 영화 <사도>는 그렇게 인간, 가족 사이의 갈등에 한발 다가가 보자는 감독의 작은 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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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