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라이프

운명을 이긴 암 환자의 특별한 믿음 <애니를 위하여>


얼마 전 할리우드의 명사 안젤리나 졸리 배우가 유방절제 수을 한다는 소식이 들렸는데요. 처음엔 잘못 들었나 싶었죠. 여배우들이 미적 이유로 유방확대 수술을 한다는 소리야 들었지만, 절제 수술이라니 무슨 사연일까 해서요. 졸리가 그렇게 무리한 결정을 한데는 다른 사유가 있었어요. 그는 유전자 검사를 통해 암에 취약한 가족력을 알게 되었고 동시에 자신 역시 유방암과 난소암에 걸릴 확률이 높다는 걸 깨닫자 예방 조치를 한 것이지요.


여러분은 그녀의 결정을 듣고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여배우로는 치명적일 수도 있는 이 결정에 대해 세간에서는 말들이 많았지요. 하지만 그 수술로 난소와 나팔관까지 모두 제거한 그녀는 “가슴과 자궁을 절제했지만, 여전히 난 여성이며 내 가족을 위해 내린 결정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는데요. “내 아이들은 이제 ‘엄마가 난소암으로 죽었어요’라는 말을 할 일이 없어졌다”라는 그녀의 연이은 말에서 아이들의 엄마로서, 가족의 일원으로서 그녀가 택한 결정과 의지에 지지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연기, 결혼, 입양 문제 등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이 화제를 모으는 졸리지만, 이 결단이 가져온 파장은 그 어느 때보다 컸습니다. 졸리의 이번 결정은 전 세계 여성들 사이에서 일명 ‘안젤리나 효과(Angelina Effect)’로 통하며, 이후 여성들의 유전자 검사 횟수가 증가하는데도 일조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졸리로 인해 최근 더 주목받은 유전적 유방암의 문제. 지금이야 많은 사람이 인지하고 있는 의학적 상식이 되었지만, 1980년대까지만 해도 학계에서 이를 언급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주장으로 여겨졌습니다. 특히 그전까지 암은 쉬쉬하고 감추는 질병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유방암의 유전적 연관을 입증하려 노력했던 용감한 여성들이 있었는데요. 한 명은 1990년 각고의 노력 끝에 유방암 유전자인 BRCA-1를 발견한 유전학자 메리 클레어 킹 박사입니다. BRCA 유전자는 유방암의 20% 정도를 차지하는 유전성 유방암 원인 유전자로, 이 유전자가 있는 여성이 유방암에 걸릴 확률은 일반인들보다 훨씬 높다고 합니다. 이는 우리 시대 가장 중요한 과학적 발견 중 하나였으며, 킹 박사는 와이즈만 과학상, 피터 그루버 재단 유전학상 등을 수상하는 등 그 업적을 인정받았습니다.

 


여기에 또 다른 캐나다 여성 애니 파커의 이야기가 나오게 됩니다. 유방암으로 할머니와 이모, 어머니, 그리고 언니를 잃고 급기야 자신마저 유방암에 걸려 병마와 싸운 여성의 이야기인데요. 이렇듯 엄청난 암의 재난 사례가 믿기지 않을 정도지만 어디까지나 실화입니다. 슬픔에 잠겨있던 애니 파커는 자신의 집안 여성들을 젊은 나이에 죽게 한 유방암이 유전적으로 발병하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지요. 그리고 더 이상 병에 굴복하는 대신 자신의 운명과 지난한 싸움을 시작합니다.


영화 <애니를 위하여>는 단순히 유방암 투병기가 아니라, 두 여성이 세상의 권위에 도전한 승리의 드라마에 가까워 보입니다. 특히 특이한 지점은 감동의 투병 드라마라면 으레 예상할 법한 각본인데, 킹 박사가 애니의 투병을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한다거나 둘 사이의 유대관계를 보여주며 눈물을 끌어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두 여성은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소신을 입증하기 위해 노력하는데요. 연구자인 킹 박사는 당시로써는 실현이 불가능해 보이는 연구를 강행한다는 이유로 지원금도 받지 못하며, “베짱이 같은 캐릭터야. 혼자 하게 내버려 둬.”라는 야유를 듣기도 합니다. 애니의 시도 역시 주변의 인정을 받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병에 쉽사리 굴복하는 대신 자신이 왜 이렇게 고통받고 있는지, 가족의 피 속에 흐르는 발암 물질이 무엇인지에 대해 공부하겠다는 그녀를 향한 시선은 곱지가 않았습니다. 의사는 애니에게 ‘걱정이 지나치다’며 “암은 가족력과 상관이 없다”라고 타이르며, 남편은 의사가 지시해주는 데 따르지 않고, 고졸인 그녀가 의학 책을 보느라 정신이 팔려있는 것을 지극히 못마땅해합니다. 애니가 “그냥 누가 날 좀 안아 줬으면 좋겠어”라고 느끼는 그 절박한 상황 속에서 결국 남편은 그녀의 곁을 떠나고 말지요.



집안의 여성뿐 아니라 어린 나이에 아버지까지 잃게 된 애니는 죽음에 대한 위협을 보통 사람들보다도 크게 느끼며 살아야 하는 가련한 존재였습니다. 그런 그녀는 어릴 때부터 집의 골방을 두려워하며 거기에 ‘죽음의 신’이 기거하고 있다고 믿는데요. 언니는 애니를 향해, “방을 지날 때 깨우지 않게 조심해. 조심하지 않으면 우리도 데려갈 거야.”라며 겁을 줍니다. 그녀에게 죽음은 골방 안에 그렇게 가까이 숨어 시시각각 자신을 노리는 유령과도 같은 존재였지요. 평생 죽음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던 그녀가 아픈 언니를 향해 “죽음이 (나를) 스토킹하는 것 같아. 암이 쫓아오는 것 같아”라고 말하는 장면은 그래서 한층 아프게 다가옵니다. 신경과민증에 가까울 정도로 자가검진을 하지만 결국 유방암에 걸린 그녀는 엄마처럼, 언니처럼 자신도 사랑하는 아들을 돌보지 못하고 죽게 될 거라는 극도의 불안감에 시달리게 되는데요. 이 영화의 진정한 반전은 한 번도 아니고 세 차례나 암에 걸려 항암치료와 수술을 하며 병마와 싸워온 그녀가 기적적으로 완치 판정을 받는 데 있습니다.


만약 애니가 자신을 끈질기게 쫓아오던 죽음에 대한 불안감을 극복하지 못했다면 회복은 불가능했겠지요. 하지만 그녀에게는 죽음의 공포로부터 단련된 ‘믿음’이라는 무기가 있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전 남편이 병에 걸려 그녀보다 먼저 죽게 됐을 때 애니는 자신이 그와 달리 병을 극복한 이유를 두고 “그는 결국 아무것도 믿지 않았고 나는 믿었다”라고 말합니다. 애니의 말을 되새겨봅니다. “믿는 것이 무엇인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믿음을 가진다는 것이 중요하다.” 독한 항암치료로 머리가 다 빠지고, 주사를 하도 맞아 혈관이 굳었을 때조차도 애니는 거울 속 자신을 응시하며 “난 누구나 반할만한 여자야. 난 특별하니까.”라며 희망적인 자기암시를 그치지 않습니다. 이 지점에 이르면 영화의 시작 부분에서 “내 인생은 한편의 코미디였어요. 난 그저 웃는 법을 배워야 했죠.”라고 낮은 음성으로 조곤조곤 말하던 애니의 강인한 의지가 느껴지는데요.


영화의 모델이자 실존 인물인 올해 64살의 애니 파커는 인터뷰에서 자신이 ‘30년 전의 안젤리나 졸리’였다고 말합니다. 그녀 역시 오늘날 유전자 진단을 받았다면 졸리와 같은 선택을 하여 수술을 받았을 거라고 말하지요. BRCA 유전자가 발견되기 전, 주변 사람들은 해결책도 없는 싸움에 매달리던 그녀를 ‘미쳤다’고 손가락질했지만, 병마와 싸워서 꿋꿋이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애니를 보니 결국 그 행동이야말로 그녀가 ‘미치지 않기 위해 해야 했던’ 가장 절박한 삶의 제스추어가 아닐까 싶은데요. <애니를 위하여>의 원제는 <Decoding Annie Parker>입니다. 실제 애니 파커가 쓴 회고록 <Annie Parker Decoded>에서 비롯된 제목으로 ‘애니 파커의 암호 풀이’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애니는 “죽음의 암호를 풀면 미래를 바꿀 수 있지 않을까?”라고 질문을 던집니다. 지난한 고통 속에서도 의지와 믿음을 잃지 않았던 애니 파커를 ‘해독’한다면 우리 모두 그녀처럼 긍정적인 미래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요?

 



  다른 글 더보기


  ▶[영화 속 보험이야기] 자식에 대한 지나친 기대가 낳은 비극 <사도>  <바로가기>

  ▶갑작스러운 엄마와의 이별 이야기를 그린 <영화 속 보험이야기> 나의 어머니  <바로가기>

  ▶과소비 때문에 곤란해진 무민 가족 <영화 속 보험 이야기> 무민 더 무비  <바로가기>

 





이화정